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랜태저넷 왕조 (문단 편집) === [[튜더 왕조]]로의 계승 === 이러한 단절과 분열이 계속된 끝에 [[장미전쟁]]의 종결 이후 랭커스터 왕조의 방계인 [[튜더 왕조|튜더 가문]]의 [[헨리 7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했다. 사실 랭커스터의 방계라고 부르기도 어려운데 헨리 7세 본인은 부계로는 잉글랜드 왕가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헨리 7세의 어머니가 마거릿 보퍼트였는데, 외가인 보퍼트 가문이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이었다.[* 보퍼트 가문은 곤트의 존이 정부 캐서린 스윈포드에게서 낳은 아이들로 창시된 가문이다. 이후 곤트의 존이 두번째 아내와 사별한 뒤 캐서린 스윈포드와 정식으로 결혼하면서 보퍼트 가문은 적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여계 승계와 외손 승계를 인정했기 때문에, 헨리 7세는 모계를 통해 에드워드 3세의 후손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보퍼트 가문도 곤트의 존이 세 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식으로 창설된 가문으로, [[리처드 2세]] 시절에 적자로 인정받긴 했지만 왕위 계승권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통성이 부족했다. 게다가 부계인 튜더 가문으로 가면 더욱 가관이다. 튜더 가문은 본래 [[브리튼인]]의 [[웨일즈]] 공가의 후손인 유서깊은 가문이었지만 잉글랜드 전체에서 보면 미약한 귀족 가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헨리 튜더의 조부였던 오웬 튜더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광인왕' [[샤를 6세]]의 딸이자 [[헨리 5세]]의 미망인이었던 [[카트린 드 발루아|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들인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를 낳으면서 듣보잡에서 벗어났다. 오웬 튜더와 카트린의 장남인 에드먼드 튜더가 바로 [[헨리 7세]]의 친아버지이다. 헨리 7세의 아버지였던 에드먼드 튜더와 그의 동생 재스퍼 튜더는 이부형이었던 [[헨리 6세]]로부터 형제임을 인정받았고, 각각 리치먼드 백작과 펨브로크 백작 작위를 하사받으며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당연히 에드먼드와 재스퍼는 자신들을 후히 대우해주는 이부형을 따라, [[장미전쟁]] 내내 철저히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 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튜더 가문에게 왕위계승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헨리 7세]]는 친가와 외가 모두가 애매한 지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가능성은 전무하다시피했다. 하지만 [[장미전쟁]]에서 [[헨리 6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전사하고, 헨리 6세마저 요크 왕조에 의해 폐위된 뒤 의문사해 랭커스터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게다가 조카인 [[에드워드 5세]]를 폐위시키고 유폐시킨 뒤 스스로 왕위에 오른 [[리처드 3세]]로 인해, 요크 왕조의 왕위 계승자들도 모조리 작살나면서 헨리 7세의 왕위 계승 가능성이 점쳐지기 시작했다. 이에 헨리 6세의 이부형제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며 보퍼트 가문의 후손인 헨리 7세가 랭커스터 지지자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왕위를 주장하게 되었다. 결국 [[리처드 3세]]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전사하고, 이후 [[헨리 7세]]가 즉위하면서 [[튜더 왕조]]가 개창되었다. 그리고 헨리 7세는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채웠다. 즉, 랭커스터의 어설픈 방계 따라지였던 헨리 7세가 요크 왕조의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면서 간신히 왕권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